돌이켜 보면

🗓️

래퍼 이센스의 첫번째 솔로 앨범 ‘The Anecdote’ 가 발매 10주년을 맞이하여 Instrumental 트랙이 포함된 기념반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한국 힙합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고, 나아가 한국 음악사에서도 여러가지로 의미가 큰 앨범이다. 음악 외적으로는 한국 최초 ‘옥중앨범’ 이라는 임팩트가 따라다니지만, 음악만 봐도 트랙 전체에서 그의 인생사, 가치관, 음악에 대한 태도 등을 날 것 그대로 엿볼 수 있다. 그래서 힙합씬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음악 애호가라면 한번은 꼭 들어볼 가치가 있는 앨범이다. 이센스는 이 기념 음반을 내면서 짧은 편지를 앨범에 숨겨놨는데, 그의 한결같은 음악에 대한 태도가 요즘 나의 바이브와 맞닿아 있는것 같아 가져와본다. 다소 비속어가 섞여있지만, 진솔함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각색없이 옮겨봤다.

The Anecdote 를 발매한지 10년이 지났습니다. 10주년이 되서 저와 동료들은 10주년 재발매를 기념해서 진심을 담은 글을 쓰는게 어떨까 얘기했고, 엄청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사실 그게 제일 이 앨범에 어울릴것 같아 싶었습니다. 그게 이 앨범을 들어주시고 10년이 지나서도 기억해주시는 분들께 제가 드릴 수 있는 성의라고 생각했습니다. 뻔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진심을 담는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한 일주일 동안 써보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일주일을 더 달라 하고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또 일주일만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쓰고 있어요. 쓰다 지우다를 반복했습니다. 사실 이 글 하나를 쓰는데 2주를 거의 다 써도 되는 상황이였거든요. 슨데도 못 썼어요. 쓰다가 끄고 유튜브 이것저것 보다가 하루가 그냥 지나가고, ‘오늘은 쉬고 내일 쓰자’ 하고 술 마시러 가고요. ‘써야 되는데 써야되는데’ 하다가 또 넷플릭스 뒤적거리고 그랬습니다. 이 글을 안 쓰고 있는 시간에 작업을 열심히 했다거나, 다른 일에 땀을 흘리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10주년 기념앨범 때문에 글 써야돼” 라고 하면서 다른 일을 미루기까지 해놓고서요. 그렇게 죄책감 같은게 생겼어요. 이게 뭐 그렇게 미치도록 힘든거라고.. 이것도 못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이더라고요. 그냥 열심히 살지도 않고 시간이나 때우던 새끼가 10주년이랍시고 뭘 나불거리나 싶고.. 거기서 더 부정적으로 뻗쳐서 ‘어쩌면 열심히 안 사는 놈이 세상 탓 하고, 남 탓 하며 투덜투덜 거리고 화내다가 결국 질질 짠 얘기 투성이인게 이 앨범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제 딱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한 줄도 못썼죠. 그러고 나서 오늘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제 스스로를 등신새끼라고 여기는 것, 한편으로는 ‘나는 최고다’ 같은 오만함, ‘나는 최고여야 한다’ 생각하며 뭔가를 하긴 하는데 약같 쫓기는 기분, 이런 것들이 막 섞인채로 지쳐버린 상태 그 상태로 만든 앨범이 에넥도트 였던 거 같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앨범이 처음 세상에 나와서 반응을 얻었을 때, 시간이 지나 이 앨범을 명반이라 평가 해줄 때, 민망함 비슷한 감정이 생겼던 거 같아요. 만약, ‘난 내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고 자부심 가진 앨범이 그런 평가를 들었다면, 저는 남들 듣기 싫을 정도로 자랑했을 것 같아요. 오만하게, 근데 에넥도트는 저에게 그런 앨범이 아니였던 거죠.

이 얘기는 다른 인터뷰에서도 많이 했던 얘기라서 저를 봐 온 분들은 ‘또 똑같은 얘기하네’ 싶을 겁니다. 똑같은 얘기 맞습니다. 전 이번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이 똑같은 얘기를 계속 썼다 지웠다 했던 거 같습니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좀 여유로워 지고, 더 현명해지고, 발전된 모습으로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지금의 저는 그 때 보다는 정신적으로 조금 여유로워 졌고, 경험이 생겨서 정말 약같은 더 현명해 졌다고 할 수 있고, 겪어낼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던 일들을 지금은 농담으로 써먹으면서 웃고 떠들수도 있고, 확실히 그 때 보다 좋은 기분으로 살고 있지만, 다시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거죠.

실제보다 더 여유롭고, 현명하고 발전된 모습으로 보이길 원했나 봅니다 ㅋㅋ 아직도 이 앨범을 만들던 당시에 갖고 있던 연예인 병 같은, 스스로를 괴롭히던 사고방식이나 습관 같은 걸 못 버렸구나 싶습니다. 말로는 어줍잖게 “진실하려 노력해야 한다”, “솔직해야 된다” 떠들지만 마음속엔 ‘어떻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거죠. 그 상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런 생각이나 계속하다가 한번씩 지랄 났던게 제 인생 같습니다 그냥. 제가 납들과 다르게 늘 진실하고, 더 순수하고, 열정있고, 헌신하고.. 그런건 절대로 아닌것 같고 ㅋㅋ

그냥 아티스트 이고 싶었고, 내가 만드는 음악에서 뭔가 느껴지길 바랐기 때문에 진실한게 뭘까? 사랑은 뭔가? 산다는 것 무엇인가? 세상은 왜 이런가? 같은 생각을 파고들듯이 한 것 뿐인거 같아요. 이게 내 직업이니까. 어느 때 부터 난 투잡 하지 않고 음악 하는 것만으로 먹고 살게 됐으니까. 남들은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고 바쁘니까 이런 생각 하다가도 멈추고 일을 해야하지만 나는 음악 만드는게 내 직업이 됐으니까 이걸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보자 했던거 같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진실한게 뭔지, 사랑이 뭔지, 세상이 뭔지 남들보다 잘 아는것도 아니고요. 지금도 솔직히 그냥 뭐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지금 주절주절 하면서 슥 올라오는 생각은, 10년전의 저는 이런 생각들을 지금보다 더 무섭게 했던 거 같긴 합니다. ‘무섭게’ 라는 말로 명쾌하게 설명이 되는건 아닌데.. 미치도록 싫어했던 것 같아요. 알고 싶었고, 막 빨리 개운해지고 싶었고, 완벽해지고 싶었던 거 같아요. 완벽이랑 거리가 정말 먼 주제에 그랬던거 같고, 그래서 좀 힘들었던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10년 전 그 때의 제 삶, 제 생각들을 ‘뭣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척 깝치려다가 지 함정에 빠진 거’ 라든가 ‘배부른 소리 그럴듯 하게 한 거’ 라든가 위에 말한 거 처럼, ‘열심히 안 사는 놈이 세상 탓 하고, 남 탓 하며 투덜대고 화내다가 결국에 질질 짠 거’ 라고 까내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의미가 없던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얘기하는 건 10년 전의 저한테 가혹하고 예의 없는 일인 거 같아요.

만약 누가 당신의 고통을 저 따위로 후려친다면 절대 가만있지 말고 닥치라고 하든지, 그냥 생까고 무시하든지 해야지, 그런 말에 상처 받고 쪼그라 들면 안됩니다. 스스로를 등신 취급하면 안됩니다. 제가 그렇게 해봤는데 별로 도움된게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나서 지금의 제가 그때 보다 정신적으로 나아졌다고 느끼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제가 그 당시의 저 보다는 제 자신의 삶을 코미디로 볼 수 있게 돼서가 아닌가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남이 나를 우습게 보는 걸 다 받아들여야 되는건 아니죠.

두서없이 떠들어 댔는데.. 멀끔하게 잘 적으려고 하다보니 2주 동안 몇줄 쓰지도 못하던 걸 ‘그냥’ 적다 보니 할 말 다 한거 같습니다. 정돈돼 있지도 않고, 맞춤법을 틀린 것 같고 그런데 다시 적진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 적으면 본심에서 멀어진 말들이 나올 거 같습니다.

진실한게 뭔가, 사랑이 뭔가, 사는게 뭔가, 세상이 뭔가 하는 얘기들이요. 취한채로 나누기도 하고, 화난채로도, 무기력한 상태로도 나누셨을 겁니다 농담으로 풀기도 했을거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근데 그런 얘기를 나누고 나면 다음날 아침엔 짐을 챙겨 삶의 현장으로 다시 나가셨겠죠. 저도 그랬었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가사로 쓰다가 일하러 갔습니다. 다른 일 안하고 음악만 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요.

에넥도트를 만들던 때, 당시의 저는 이미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는 것 만으로 밥을 먹고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일’ 이라고 표현 한다면, 일이 맞기도 합니다. 일로써 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그 일이라는 게 감정을 얘기하고, 보고 느낀 걸 표현하고 그런거 잖아요. 여러분께서는 가끔 그걸 표현하고, 얘기하고 나면 일자리에서 그걸 또 다시 꺼내시진 않죠. 일자리에선 감내하고, 핸들링 하고, 땀 흘리며 일 해야 하니까.

저는 근데 감정을 얘기하고, 느끼는 걸 표현하는 것 만으로 제 일을 다 한게 됐던 겁니다. 들으신 분들이 멋지다 하고 까지 해주십니다. 공연을 하면 박수도 보내주십니다. 그걸로 밥도 먹고 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제가 하고 싶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큰 감사를 느낀다고 말씀드립니다. 진심으로.

저는 저를 위해 살아가며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최고로 위하며 살아가셨으면 좋겠고, 여러분께 제가 만든 음악이 유희가 되든, 위로가 되든, 심심풀이가 되든, ‘저러지 말아야지’ 싶은 구경거리가 되든, 뭐가 됐든 어떻게든 쓰임세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느 때는 내가 남들보다 의지가 있고, 더 노력을 해서 지금의 삶을 이룬거다 라는 생각이 들고, 어느때는 난 강하지 못하고, 부지런 하지도 안혹,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놈인데, 운 좋게도 사람들이 그런 날 응원해줬기 때문에 억지로 떠밀려서라도 여기까지 온 거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 란 말을 했지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긴 합니다.

근데 이 글을 쓰면서 느낀게 있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의지있게 더 열심히 한 적도 있고 강하지 못했고, 해맸고, 자기파괴적으로 군 적도 있다.

둘 다 나다.

근데 축복이었던 것은 내가 의지있어보이고, 자신있어 보일때는 그것대로 박수를 받았었고, 반대의 경우에는 공감이 돼서, 혹은 위로가 돼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고 공감이 되지 않더라도 힘내라는 격려를 받으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계속 해나가 보겠습니다.

횡설수설, 정신없는 글을 여기서 마치면서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The Anecdote는 2015년 8월에 발매되었고, 나는 같은 해 5월에 ‘내가 잘 하는 것’ 중 하나로 ‘드디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중간에 짧지 않은 휴식기도 있었지만, 한번도 손과 머리 속에서 떠난적은 없었다. 어쩌면 이 우여곡절 사연 가득한 회고가 그래서 더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10년을 기념하며.

🏷️